많은 국민에게 대통령 이승만은 ‘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인 사람’으로 기억되고 있다. 이승만은 1934년 두 번째 아내인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도너 리(1900~1992)와 결혼했다.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. 이승만이 만 82세가 되던 1957년 생일에 같은 전주 이씨인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. 이때 이강석은 만 20세였다. 이기붕은 이승만의 비서 출신으로 당시 권력의 ‘2인자’라 불렸다. 그러나 1960년 4·19 직후 이강석은 친부모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자살했다.
이후 하와이로 간 이승만 부부는 ‘조상을 모실 아들이 없다’며 한탄했다.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순영이 ‘전주 이씨 종중에서 양자를 천거해 달라’고 했고 ‘영어를 할 줄 아는 대졸자, 좋은 집안 출신의 미혼자’라는 조건을 내걸었다. 이 조건에 다 맞았던 이인수(1931~2023)는 독일 유학의 꿈을 접고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. 그는 1965년까지 세 차례 하와이에 머물렀고 이승만의 임종을 지켰으며 유골함을 들고 입국했다. 미국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단국대와 명지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으며, 이승만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는 데 헌신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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